문학여행

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

미소소율 2013. 6. 12. 13:15

사랑하는 당신.

그 여자..... 그 여자 얘길 당신에게 해야겠어요.

여섯 살이었을까? 저는 그토록 뽀얀 여자를 본 적이 없었어요.

머리에 땀이 밴 수건을 쓴 여자,얼굴의 주름 사이로까지 땟국물이 흐르는 여자,

들깻잎에 달라붙은 푸른 깨벌레를 깨물어도 그냥 삼키는 여자,

아궁이의 불을 뒤적이던 부지깽이로 말 안 듣는 아들을 패는 여자,

방바닥에 등을 대자마자 잠꼬대하는 여자,

계절 없이 살갗이 튼 여자.....이렇게 일에 쩌들어 손금이 쩍쩍 갈라진 강팍한 여자들만 보아왔던 것이니,

그 여자의 뽀얌에 눈이 둥그렇게 되었던 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.


그 여자는 파란 페인트칠이 벗겨진 대문을 통해 우리집으로 들어왔고,

대신 그 대문으로 어머니께서 자취를 감췄습니다.


아버지는 그 여자를 정말 사랑했습니다.

아버지는 그 여자가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들어오면  손 크림을 발라주셨지요.

아버지의 그 환한 모습을 그 이후에도 그 이전에도 본 적이 없는것 같아요.


맛이야 어떻든 그 여자의 음식은 어머니가 쑤어준 풀떼죽하고는 확실히 달랐지요.

맨밥에 반찬 싸가는 것이 도시락인줄만 알았는데 그 여자의 도시락은 꽃밭, 꽃밭을 연상 시키더군요.


사랑하는 당신!

.....여기에 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.

이 마을은     저를, 저 자신을 생각나게 해요.

.....그 여자 처럼 되고 싶다.....

이것이 제 희망이었습니다.

당신, 저를, 용서하세요.

점촌 아주머니를 혼자 살게 한 점촌 아저씨의 그 여자,

중년 여인으로 하여금 울면서 에어로빅을 하게 만든 그 여자,

어머니를 나가게 하고 우리집으로 들어와 한 때를 살다간 아버지의 그 여자.....

제가 바로 그 여자들 아닌가요?


사랑하는 당신,

노여워만 마세요. 

당신께 이런 글을 쓰려고 고향을 찿은건 아니었습니다.

다만 떠나기 전에 , 아무것도 모르시는 부모님과 작별을 하려고 온 것입니다.

당신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나면 이 분들을 살아생전에 다시 뵐수나 있을까, 하는 생각에.


당신과의 약속 시간은 이제 이 밤만 지나면 다가옵니다. 

당신은 정말 떠나실 건가요?


지금..... 막, 당신과의 약속 시간이 지났습니다.

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 

                  비슷한 부분이라곤 한 군데도 없는 주인공의 生과 감정에 휘말려 한동안 한줄의 글도 읽을수 없었던

                  신경숙의 단편 소설이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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